성인·순교자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묵시 7,14)
성 한재권 요셉
청주 한씨이며, 자(字)는 원익(元益)이었다. 그는 아버지 한언적(도미니코)와 어머니 성주 배씨로부터 충청도 진잠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하고 근면 성실할 뿐 아니라 신자로서의 본분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고향에 살 때부터 순교하기를 각오하고 살았다. 그는 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이 있었는데 훗날 김 루카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재권, 재용, 재식, 재관 4형제를 데리고 완주군 비봉면 다리실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다시 손선지가 정착하여 살고 있는 소양면 대성리 신리골로 이사하였다. 그가 체포되기 며칠 전이었다. 풍문에 머잖아 이 마을에 박해가 닥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내와 동생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체포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면서 자기 뒤를 따르라고 하였다. 그런 말이 있기가 바쁘게 1866년 12월 5일 저녁 무렵 손선지, 정문호와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던 날 밤은 일행과 함께 구진리 주막에서 자고, 다음날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진영 앞 구류간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가장 큰 괴로움은 재권을 구출해 내려는 아버지의 구명운동이었다. 아버지 한언적은 평소 친분이 있는 박 별감(別監)에게 부탁하여 아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장자인 재권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한언적의 부탁을 받은 박 별감은 영장(營將) 이근섭에게 뇌물을 써서 석방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배교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나 한재권은 이러한 아버지의 행동이 고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배교란 말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며, 아버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순교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치명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더 소중하였던 것이다. 옥에 갇혀있던 교우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는 배교를 재촉하는 영장에게 “사람이 세상에 있어 순경(順境)에는 부모를 부모라 하고, 역경(逆境)에는 부모를 부모라 아니 하오리까. 그러므로 못하나이다.” 하고 거절하였다. 아들을 구명하려는 아버지의 뜻은 끈질겼다. 그래서 형청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어떻게 해서라도 석방될 수 있게 힘써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배교는 절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아들들이 있으니 자기는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꼭 순교하고 말겠다고 하였다. 1866년 12월 13일 바라고 바라던 순교의 날이 왔다. 그는 다른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같은 절차를 거쳐 형장에 무릎을 꿇었다. 휘광이가 칼을 치기 쉽도록 목을 내밀자 첫 칼에 목이 잘렸다. 그의 나이는 아내 서 막달레나의 증언에 의하면 38세였다. 한재권이 처형된 후 그의 가족들은 손선지의 가족과 함께 다리실로 왔으나, 골짜기가 협소해서 거처가 마땅치 않아 다리실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가 그의 유해는 가족들이 손선지와 함께 1867년 3월 6일 거두게 되는데, 당시 이장 일을 주관하였던 손선지의 아들 손순화의 증언에 의하면 한재권과 정문호의 유해는 시목동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재권의 가족과 형제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손선지의 곁에 묻고 간 듯하다. 그리고 사실 가족들은 다리실로 성묘를 다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묘소를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그 까닭은 그의 직계 후손이 없는데다가, 그의 아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살길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하도 가난해서 성묘를 나닐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어느 때던가, 세월이 흐른 후였다. 순창의 내동, 구장리에 살던 후손들이 한재권의 유해를 다리실에서 순창 내동에 마련한 가족묘지로 옮기려 하자 다리실 공소 신도들은 막았다. 순교자는 교회의 순교자이므로 가족들이 임의로 옮겨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리실에 그냥 모셔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재권은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 1984년 5월 6일 시성(諡聖)되었다.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 1998, 295-297 참조)대전광역시 유성구 교촌로10번길 17 / 042-542-7004
2. 전주 숲정이 성지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공북로 19 / 063-255-2677